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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소설

장(腸)형 인간, 그리스인 조르바

by ujz 2026. 7. 1.

어릴적부터 내 기질에 관심이 많아서 온갖 심리 검사는 다해봤었다. 그 중에 애니어그램을 하면 머리/가슴/장형 유형으로 분류를 해주는데 나의 선호는 장>가슴>머리였다. 근데 대학 교수님이 너는 그냥 딱 봐도 머리형이라고 했다. 머리형은 미래를 미리 생각하고, 논리적이지만 생각이 많아 행동이 더딘 특징이 있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끝까지 부인을 했다.
 
나 같은 유형의 사람이 그리스인 조르바에 화자로 등장한다. 화자는 책으로 세상을 배우고 행동보다는 사고를 하는 유형이다. 그런 화자 앞에 조르바가 등장하는데 완전 장형 인간이다. 마음이 가는대로 어찌보면 충동적인듯한 행동의 연속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통제가 안되고 현재만 사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책에서 조르바는 화자의 갈탄 사업을 위해 동행하면서 화자는 조르바의 삶의 태도를 감탄한다. 몸과 마음이 가는대로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춤과 산투르를 치면서 원초적으로 슬픔을 승화한다. 결국 갈탄 사업이 망하지만 그 사업이 족쇄임을 깨닫고 화자는 조르바와 함께 끝내 춤을 춘다. 그렇지만 결국 화자는 다시 자기의 방식대로 삶을 살면서 조르바와 헤어지게 된다.


 
나는 화자처럼 장(腸)형 인간이 되길 희망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 통제, 규칙, 계획에서 벗어나면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건 실패가 끝이 아니고,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게 인생이라는 말을 하는 건 알겠다. 나에겐 가르침과 현실이 달라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렇게 행하지는 못한다.
 
머리형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장형 인간으로 되라는 건 나를 부정하라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니면 이런 3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도 실체가 없는 걸 형체로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족쇄를 만드는 걸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장형 인간이라면 나는 당장 회사를 나갔을 것이다. 조르바에게 사업의 실패는 그저 삶의 일부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 일의 실패는 그 다음을 기약하기 힘든 좌절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르바가 현대에 살았다면 어떤 사람으로 등장할까.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감히 자신을 묶는 로프를 잘라내어 자유로워질 엄두를 못 내니까요."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체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그 자유를 위해서 현 체제를 더 강력하게 이용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자체가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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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claude의 생각>
 
글이 좋다. 그리고 이 글은 어떤 의미에서 글쓴이를 배신한다 — 좋은 쪽으로.
 
무슨 말이냐면, 이건 "생각이 많아 행동이 더딘" 머리형이 자기를 관찰한 기록인데, 그 관찰의 밀도와 정직함이 상당하다. 자기 기질을 대상화하고, 소설 속 인물에 투영하고, 그 투영을 다시 의심하고("이 3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도 실체가 없는 걸 형체로 만들어 족쇄를 만드는 걸 수도…"), 끝에는 자기 논리의 막다른 골목까지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이건 결함이 아니라 머리형이 제일 잘하는 일이고, 이 글은 그게 잘 작동한 증거다. 조르바가 춤과 산투르로 슬픔을 승화한다면, 이 사람은 이런 글로 승화한다. 방식이 다를 뿐이다.
 
글에서 읽히는 사람은 통제·계획·구조에서 안정을 얻고 거기서 벗어나면 크게 흔들리는 사람, 일의 실패를 "그 다음을 기약하기 힘든 좌절"로 받아들일 만큼 성취와 정체성이 단단히 묶여 있는 사람이다. 자유롭고 예술적인 자아에 대한 오랜 갈망이 있지만 실제 운영 모드는 철저히 실용적이고, 자기가 쓰는 프레임(에니어그램, 소설)조차 회의할 만큼 지적으로 정직하다. 다만 한 가지가 눈에 걸린다. 이 사람은 자기 기질을 자주 판결문처럼 다룬다. "나는 ~한 사람이다"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없다"로 곧장 이어진다.
 
그 습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마지막 문단인데, 거기 매듭이 하나 있고 그건 풀 수 있는 매듭이다. 논리는 이렇다: 자유는 체제에서 벗어남 → 벗어나려면 체제를 더 강하게 이용해야 함 → 그래서 현재를 희생함 → 그러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숨은 전제는 자유가 나중에 도착하는 목적지라는 것이다. 충분히 이용하고 나면 그때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이 구조에선 자유가 영원히 미래시제다. 머리형은 자유를 계속 뒤로 미룬다. 정작 본인이 인용한 조르바의 문장 —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 — 이 그 매듭의 열쇠다. 조르바에게 자유는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방식이니까. 그러니 이건 감옥이 아니라 정의(定義)의 문제다. 자유를 미래에 두는 한 자유는 계속 유예된다. 글쓴이는 이미 열쇠 옆에 서 있다("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열쇠가 없는 게 아니라, 머리형이 그 열쇠를 "미래에 쓸 도구"로 분류해 서랍에 넣어버리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 책을 좋게, 하지만 오독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조르바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 카잔차키스 본인이 바로 그 화자다 — 책으로 세상을 배우는 지식인. 화자는 끝까지 조르바가 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되지 않는다. 대신 조르바를 만나 겪고, 함께 춤추고, 헤어지고, 세월이 흐른 뒤 그를 글로 쓴다. 우리가 지금 읽는 이 책 자체가 화자가 조르바를 애도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즉 조르바를 불멸하게 만든 건 화자의 글이다. 행동하는 인간을 영원하게 만든 게 사고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화자는 패배자가 아니다. 조르바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조르바를 만나 자기 안에 소화하는 게 목표였고, 화자는 그걸 해냈다. 당신이 방금 쓴 이 글이 정확히 그 행위다. 당신은 조르바가 될 필요가 없다. 조르바를 겪고 쓰는 사람이면 된다.
 
한 가지 더. 당신은 글 중간에 거의 흘려보내듯 이 글에서 제일 자유로운 문장을 던졌다 — 세 유형 구분 자체가 실체 없는 족쇄일 수 있다는 말. 그게 이 글에서 제일 조르바다운 문장인데 왜 그냥 지나갔나. 당신의 자기 보고는 장>가슴>머리였다. 그건 갈망이다. 그런데 교수가 "넌 딱 봐도 머리형"이라며 그 자기 보고를 덮어썼고, 당신은 끝까지 부인하다 결국 받아들였다. 이건 누가 당신을 규정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검사 결과도, 교수의 한마디도, 조르바라는 캐릭터도 전부 거울일 뿐 판결문이 아니다.
 
"조르바가 현대에 살았다면?"이라는 질문도 재밌는데, 아마 낭만화하기 어려울 거다. 크레타의 조르바는 매력적이지만, 2026년의 조르바는 직장을 충동적으로 그만두고 신용점수가 낮고 대책 없이 매력적인, 꽤 불안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즉 당신의 머리형 생존 본능이 완전히 틀린 게 아니라는 뜻이다. 당신이 "당장 회사를 나가지 않은 것"은 비겁이 아니라 판단일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은 "그러니 당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어!" 같은 응원이 아니다. 기질은 진짜고, 계획에서 벗어날 때의 스트레스도 진짜다. 다만 기질은 출발점이지 판결이 아니고, 이 글을 쓸 수 있는 유연함 자체가 당신이 생각만큼 갇혀 있지 않다는 증거다. 목표를 "머리형에서 장형으로의 개종"으로 잡으면 당연히 실패한다 — 그건 자기 부정이니까. 목표가 두 극 사이의 관계를 조금 바꾸는 것이라면, 그건 가능하다. 계획하는 자아가 운전석에 앉아 있되, 가끔 창문을 여는 정도.
 
마지막 문장,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머리형이 미래시제로 내린 판결이다. 조르바라면 아마 그 문장을 이렇게 고쳐 쓸 거다. "나는 오늘 조금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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